정윤정 지역아카데미 대표이사 (한국4-H본부 연구위원)
정윤정 지역아카데미 대표이사 (한국4-H본부 연구위원)

연세 지긋하신 농업인 한 분이 강의하고 있는 내게 물었다.

“정박사 프랑스에서 박사학위 했다고요?”
“네.”
“그럼, 잘 알겠네. 학사 위에 뭐가 있는지 아쇼?”
“석사요.”
“석사 위에는요?”
“박사요.”
“박사 위에는 뭐가 있는지 아쇼?
머뭇머뭇 거리자 “박사 위에 농사 있지요.”라고 하셨다.
가슴에 와 닿았다. 긍지와 자부심도 느껴졌다.

교육학을 전공하고 2005년에 농업농촌분야에서 일을 시작한 이유는 농업농촌의 교육적 가치를 실현해보고 싶어서였다. 농업농촌의 인적·물적자원을 바탕으로 학교교육과정과 연계된 교육프로그램을 정기적으로 제공하는 교육의 장, 농촌교육농장사업을 추진한 것이다. 학교교육과정, 아동발달의 특성, 교육활동계획안 작성 등을 학습하는 농촌교육농장 교사양성과정에 수많은 농업인들이 몰려들었다. 대기자가 많아 3년 걸려서 겨우 참석하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농업인이 있는가 하면, 새벽에 일어나 백령도에서 배타고 어렵게 왔는데 청강이라도 하게 해달라는 농업인도 있었다. 농업인들의 열정이 느껴졌다.

농업인들과 교육프로그램을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오랜 세월 땅을 일구며 농작물을 키우고 동물을 사육해 온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었다. 온 몸으로 터득한 동식물의 생육원리에서부터 삶의 지혜가 고스란히 담긴 이야기들이었다. 프랑스 교육사상가 쟝 자크 루소가 ‘농부처럼 일하고 철학자처럼 사고하게 하라.’고 했던 말이 실감났다.

농촌교육농장에서 이루어진 교육활동에 참여한 아이들의 반응 역시 매우 긍정적이었다. 학이시습지불역열호(而時習之不亦說乎)라 했던가. 농장에서 배우고 익히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은 학교 교실에서 보는 모습과 사뭇 달랐다. 아이들은 “여기가 학교였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하는가 하면, 농장주에게 엄지손가락을 세워 보이며 “선생님, 존경해요.”라고도 했다. ‘살아 있는 경험적 지식과 지혜 그리고 천심을 닮은 농심을 느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농촌교육농장을 운영하는 농가 가운데 부모의 뒤를 잇는 승계농의 비율이 높은 편이다. “저희 부부는 새벽에 일어나 밤늦게까지 옥수수, 감자를 심었던 1,000평 밭을 밀원식물원으로 만들고, 학년별 교안도 작성하고 참 열심히 했죠. 고단해도 행복했어요. 매출도 농촌교육농장을 운영하기 전보다 4배나 늘었지요. 그런데, 가장 기쁘고 좋은 것은 삶의 격이 달라졌다는 것과 저희 아들이 뒤를 잇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횡성에서 농촌교육농장을 운영하고 있는 에덴양봉원 농장주의 이야기다.

농업·농촌의 다원적 가치에 바탕을 둔 다기능 농업이 대세인 요즘, 농업인들은 생산에서부터 농촌관광 서비스 산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고 있다. 그들 가운데는 스스로를 종합예술가라 일컫는다. 어색하지 않다. 농산물을 생산하는 활동은 물론이요, 농장을 미학적으로 설계하여 꾸미고, 체험, 교육, 치유 활동이나 팜카페, 농가 레스토랑 등을 운영하며, 이를 홍보하는 일까지 그들의 역할은 실로 다채롭다. 기후 위기, 생물 다양성 보전, 식량 안보, 안전한 먹거리 등과 관련한 핵심 이슈들은 농업·농촌 가치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를 수호하는 파수꾼인 농업인들을 재조명하게 한다.

자연이 물질세계를 채웠던 산업혁명 이전과 달리, 인간 문명의 변곡점을 이룬 산업혁명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환경오염, 기후변화, 물과 대양, 오존층과 생물종 다양성의 고갈 등 자연 파괴로 인한 인류문명의 위기도 함께 안겨주었다. 지속가능성에 대한 위협에 직면한 인류생존의 문제해결을 위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공존과 공생에 대한 성찰이 절실해졌다. 4차 산업혁명의 인공지능, 빅테이터 등과 같은 과학과 기술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새롭게 매개해 줄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목소리도 높아지고 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연세계와 친밀감을 느낀다. 심지어 텍사스 A&M의 환경심리학자 로저 울리치의 연구보고에 따르면, 인간은 스트레스를 받은 후 자연이 담긴 화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5분 안에 안정을 되찾아 근육 긴장도, 맥박, 피부 전도율이 급격히 하락한다고 한다. 자연적인 것에 대한 인간의 욕구는 우리의 유전자가 여전히 인공화된 현대 문명에 완전히 적응하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4차 산업혁명시대를 사는 현대인의 유전자는 여전히 12만 세대(인류역사의 99.5%를 차지함)에 걸쳐 형성된 숲 속 인간의 유전자라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린 라이프(Green life)에 대한 동경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그린 라이프가 가능한 농업농촌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생존위협으로 인해 동경을 넘어 삶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황금들녘이 내다보이는 야외에서 컴퓨터 하나 들고 일하는 청년의 모습을 담은 영상이 낯설지만 신선한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개성 있는 삶을 추구하며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꿈꾸는 청년세대들이 늘고 있다. 이들은 부모세대와 다르다. 인생을 우열이 아닌 다름으로 인식한다. 도시를 기반으로 한 물질문명적 성공신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열을 가르는 경쟁적 삶을 쫓지 않는다. 이와 같은 청년들이 농업농촌과 4차 산업혁명의 과학기술을 접목시켜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지속가능한 인간 삶을 만들어가는 상상을 해본다. 그리고 그들은 “박사 위에 농사 있다!”는 말 대신 어떤 말을 던질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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